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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 순간/책장

『제7일』- 위화 지음

 


제7일

저자
위화 지음
출판사
푸른숲 | 2013-08-30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세계가 사랑한 작가 중국 최고 이야기꾼의 귀환! [허삼관 매혈기...
가격비교 글쓴이 평점  

 

펑페이 빌딩에서 투신 자살로 죽은 슈메이(류메이)의 염을 해주는 장면은 단언 압권이었다.

글을 읽음과 동시에 영상이 눈앞에 그려지는데 감히 숨소리도 낼 수 없을 정도로 아릅답다 못해 경외로워,

겨우 힘겹게 단말마 같은 외마디 감탄사를 내뱉을 수 있을 뿐이었다.

 

 

적막 속에 앉아 있으니 가물가물 졸음이 몰려와 다시 눈을 감았다. 그러자 예쁘고 똑똑한 리칭이 보였다. 우담바라처럼 반짝했다 사라진 사랑과 우담바라처럼 반짝했다 사라진 결혼 생활이 보였다. 그 세계가 떠나가고 있는데 그 세계 속의 옛일이, 버스에서 내가 처음 리칭을 보았던 광경이 느릿느릿 다가왔다. -p50

 

 

감정에 관한 한 나는 문과 창문이 꼭 닫힌 집처럼 답답하고 둔했다. 사랑이 문 앞을 왔다 갔다 하면서 내는 발걸음 소리를 분명히 들으면서도 그게 지나가는 행인의 발걸음, 다른 사람을 향한 발걸음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발걸음이 멈춘 다음 현관의 벨을 눌렀다. -p60

 

 

그런 다음 잠시 말을 끊었다가 가만가만한 목소리로, 바깥에서는 갈수록 당당해지지만 저녁에 집으로 돌아오면 점점 더 외롭고 쓸쓸해져, 그럴 때마다 사랑하는 사람이 옆에 있으면 좋겠다고 간절히 바랐다고 말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 눈이 촉촉해진 그 순간 그녀는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있다는 따뜻함을 느꼈고, 그 뒤 며칠 동안 내가 자신 옆에 있어줄 사람이라는 생각이 강해졌다고 했다. -p66

 

 

그녀를 도와 커다란 여행 가방 두 개에 옷을 정리해 넣었다. 그러고는 가방을 들고 길가로 배웅을 나갔다. 먼저 그가 묵는 호텔에 들러 둘이 함께 공항으로 간다는 걸 알았기 때문에 택시를 잡아 트렁크에 가방을 실었다. 헤어질 순간이 되었다. 그녀에게 손을 흔들자 그녀가 나를 꼭 안으며 말했다.

"여전히 당신을 사랑해."

"나는 영원히 당신을 사랑해."

그러자 그녀가 울면서 말했다.

"편지도 쓰고 전화도 할게."

"편지도 전화도 하지 마." 내가 말했다. "그럼 많이 힘들 거야."

택시에 올라 떠나갈 때 그녀는 나를 보지 않고 눈물만 닦았다. 그렇게 떠나갔다. 그렇게 운명으로 정해진 자기 삶의 길에 올랐다. -p71~2

 

 

  기차의 덜컹거림이 끊이지 않는 철길 옆에서 4년을 사는 동안 나는 한 번도 기차를 타본 적이 없었다. 생전 처음 기차에 올라 창문 유리에 얼굴을 붙이고 있다가 기차가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 플랫폼에 서 있는 사람들이 점점 빠르게 뒤로 멀어질 때 나는 놀라서 으앙 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그런 다음 집과 도로가 빠르게 뒤로 사라지고, 들판과 저수지도 빠르게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았다. 가까이에 있는 것일수록 빨리 사라지고, 멀리 있는 것일수록 늦게 사라지는 게 이상해 아버지에게 물었다.

  "왜 그런 거예요?"

  아버지가 슬픈 목소리로 대답했다.

  "모르겠구나." -p106

 

 

나와 하오샤는 절친한 소꿉친구였다. 우리는 나중에 크면 결혼하자고, 그러면 계속 같이 있을 수 있다고 몰래 약속하기도 했다. 그 때 하오샤는 이렇게 말했다.

  "네가 아빠 하고, 내가 엄마 하고."

  그 당시 우리가 아는 결혼이란 아빠와 엄마의 조합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더 정확하게는 남편과 아내의 결합이란 걸 이해한 뒤, 우리는 누구도 그 비밀스러운 약속을 거론하지 않았고 똑같은 속도로 그 약속을 잊어버렸다. -p131

 

 

그 푸른 바위로 돌아가 나를 찾았을 때 추위를 견디려고 내가 온몸에 나뭇잎을 덮었더라며, 세상에서 나보다 똑똑한 아이는 없을 거라고 말했다. 그날 밤 갑자기 내 기억이 또렷해지면서 돌과 수풀, 풀덤불, 날 두렵게 했던 개 짖는 소리가 생각났다. 나는 추워서가 아니라 무서워서였다고, 개 한 마리가 계속 왕왕 짖었다고 말했다.

"어쩐지, 네가 머리에도 나뭇잎을 덮었더라."

내가 헤헤 웃자 아버지도 헤헤 웃었다. 그런 다음 조용히 말했다.

"나는 죽는 게 두렵지 않아. 조금도 두렵지 않단다. 내가 두려운 건 다시는 너를 못 보는 거야." -p135

 

 

나는 첩첩이 이어진 푸른 숲에서 걸어 나오듯 점차 복잡해지는 기억에서 빠져나왔다. 피폐해진 생각은 누워 쉬도록 하고 ,몸만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한도 끝도 없는 혼돈과 소리도 숨결도 없는 공허함 속을 걸었다. 하늘에는 날아다니는 새가 없고, 물속에는 헤엄치는 물고기가 없으며, 대지에는 생장하는 만물이 없었다. -p151

 

 

우리는 정적 속을 걸었다. 정적의 이름은 죽음이었다. 우리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우리의 기억이 더 이상 나아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른 세상의 기억이고, 뒤엉킨 과거이며, 허무이자 진실이었다. -p175

 

 

나는 머릿속에서 갑자기 떠오른 생각을 이야기했다. "왜 죽은 뒤에 오히려 영원히 사는 것처럼 느껴질까요?"

  그는 공허한 눈동자로 나를 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왜 죽은 뒤에 안식의 땅으로 가야 합니까?"

  내 물음에 그가 웃는 듯하더니 말했다.

  "모르겠소,"

  "왜 스스로를 재로 만들어야 하는지 이해가 안 됩니다."

  "그건 규칙이라오."

(중략)

"젊은이, 너무 많이 생각하지 마시게나." -p215

 

 

즐겁게 웃고 떠드는 소리가 사방에 가득했다. 사람들은 유쾌하게 먹고 마시면서 떠나온 세계의 중금속 쌀이나 멜라민 분유, 쓰레기 만두, 가짜 달걀, 피혁 우유, 화학 첨가제 훠궈(중국식 샤브샤브), 대변 처우더우푸(냄새가 특이한 발효 두부), 수단홍, 저질 식용유 등을 신나게 비난했다. -p216

 

 

모두 떠나간 세계에서 기억하기 싫은 가슴 아픈 일을 겪었고, 모두 하나같이 그곳에서 외롭고 쓸쓸했다. 우리는 스스로를 애도하려 한자리에 모였지만 초록색 모닥불 주위에 둘러앉았을 때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다.

아무 말도 없고 아무 행동도 없이, 그저 조용히 서로를 바라보며 웃었다. 우리가 침묵 속에 앉아 있는 것은 다른 무엇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냥 우리가 혼자가 아니라 무리라는 것을 느끼기 위해서였다. -p227

 

 

가자, 저기 나뭇잎이 너한테 손을 흔들고 바위가 미소 짓고 강물이 안부를 묻잖아. 저곳에는 가난도 없고 부유함도 없어. 슬픔도 없고 고통도 없고, 원수도 없고 원망도 없어……. 저기 사람들은 전부 죽었고 평등해.

  "저곳은 어떤 곳인가요?"

  그가 물었다.

  "죽었지만 매장되지 못한 자들의 땅."

  내가 대답했다. -p3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