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이 순간/책장

돌아서면 잊혀진대도, 정세랑『 피프티 피플』

Rachel Lee 2020. 3. 29. 15:44
피프티 피플
국내도서
저자 : 정세랑
출판 : 창비(창작과비평사) 2016.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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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대 이후의 소설을 거론할 때면 빠지지 않는 정세랑 작가.
그가 궁금해서이기도, 책태기를 극복해 보고자 술술 진도가 빠지는 소설을 찾아서이기도.

 

지금 당장 읽지 않고서는 배길 수 없는, 그런 책들이 떠오르는
어딘가 충족되지 않아 공허한 밤이면, 이북을 구매해서 작은 휴대폰 액정으로 읽어나간다.

 

3월 8일에서 9일로 넘어가던, 전 주의 과제를 털어내고

하루 더 생긴 휴가에 앞서,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한 책이었다.


그런 책이었으나.. 코로나 사태에 놓여있는 요즘,
병원을 주요 공간으로 하여 펼쳐지는 이 소설이 가볍게 읽힐래야.

 

갑갑하고, 화나고, 슬프고, 무력한 체험들이 반복되고
그럼에도 단단한 심지로 삶을 이어가는 인물들을 보며
어쩐지 활기를 받기보단 덩달아 힘겹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그래서인지 바빠서인지 한동안 이 책을 덮어두고 지냈고,
'이왕 시작한 거 끝은 봐야지'란 심정으로 다시 책장을 펼쳤을 땐
앞서 읽었던 인물들이 모조리 머릿속에서 리셋되었다는..

 

굳이 인물관계도를 그리며 읽지 않았다. 잊혀진 사람은 잊혀진대로.

그래도 괜찮았다.

 

여전히 현실과 똑 닮은 소설을 읽는 일은 힘들지만,

 

진선미, 문우남, 이호 세 사람의 기운을 받았으니
그거면 됐다.

 

아프지 말자.

 

 

애선은 한때 자기가 얼마나 딸을 가지고 싶어했는지를 떠올렸다. 두 며느리를 생각하자 딸과 그리 다르지 않게 느껴졌다. 자식이 넷이구나, 넷. 보살이 아니라 아수라가 되어서라도 지키고 싶은 자식이 넷. 그러나 그 아이들을 지킬 건 팥 밖에 없고. 팥 정도밖에 없고. (최애선, p8)

 

 

잘 웃는 사람, 친절한 사람, 다정한 사람이었지만 결코 쉬운 사람은 아니었다.

"자주 가야 우리 테이블이지. 다음에 서울 가면 저기 갈까?"

"으응, 아니."

윤나는 환의가 잘 모르는 자기만의 기분에 빠질 때 늘 그런 식으로 대다뱄다. '응'을 조금 길게 말한 다음 '아니'로 끝냈다.

"왜? 주인이 아직 우리 기억할걸?"

"그냥. 그냥, 그 시기는 끝났어. 끝났지만 지금이 좋아."

윤나는 그렇게 말하며 머리를 기대어왔었다. 윤나의 길고 느슨한 파마머리가 간지럽게 몸을 덮었다. 그 시기, 라고 끊어 말하니 정말 옛날처럼 느껴졌다. 그래봐야 몇년 전인데. 그때 두사람은 무슨 이야기를 했던가. 환의는 무슨 이야기를 했던가. (이환의, p5)

 

 

효율적인 것을 굉장히 좋아하는 뇌였다. 적재적소에 귀신같이 배치된 사람들이 각자의 잠재능력을 극한까지 끌어올리는 풍경이 가장 아름답다고 느끼는 그런 뇌. (유채원, p7)

 

 

무르익은 중년의 두사람은 각자 부모의 발등 위에 올라가 춤추던 어린 시절을 떠올리고, 상대방의 어린 시절을 상상했다. 애잔하면서도 기분이 좋아져서 선미의 발에 물기가 완전히 마를 때까지 계속 계속 춤을 췄다. (문우남, p9)

 

 

친절해. 사람들은 친절해.

그게 거짓말인 줄은 알고 있다. 고장난 트렁크를 친절하게 들어주는 사람이 집에 가면 자기 가족에게 어떤 얼굴을 할지 아무도 알 수 없다. 거짓말 너머를 알고 싶지 않다. 이면의 이경 따위. 표면과 표면만 있는 관계 속에서 살아가고 싶다. (강한영, p9)

 

 

발레라든지 리듬체조라든지, 그런 아름다움과 강인함이 모두 필요한 퍼포먼스 (김혁현, p1)

 

 

살아 있는 게 간발의 차이였다. 그 '간발 차'의 감각이 윤나를 괴롭혔다. 자칫했으면 이 팔들이, 살아 있는 팔들이 썩고 있을 뻔했다. 죽음은 너무 가깝다. 언제나 너무 가깝다. 전철에서 지나치게 몸을 밀착하는 기분 나쁜 남자처럼 가깝다. 무시하고 잘 살아가는 사람도 있는 반면 윤나는 늘 등 뒤를 돌아보고야 마는 편이었다. (배윤나 p3-4)

 

 

알고 보니 세상에서 자기 아프다는 말을 가장 잘하는 사람들이 시인들이었다. 아프다는 말을 아름답게 해버리는 동료들 덕에 말할 수 있게 되었다. (배윤나, p4)

 

 

같은 사람들이다.

그 짧은 문장이 갑자기 떠올랐다. 떠오르고 나서 이해가 되었다. 같은 사람들이었다. 토대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대학을 통폐합시킨다. 보이는 토대와 보이지 않는 토대를 다지지 않고 허무는 사람들 말이다. 발밑으로 모래가 플러도 신경 쓰지 않는 사람들, 그리하여 입을 벌린 구덩이를 바라보는 이들의 등을 뒤에서 밀어버리는 사람들...... 같은 사람들이야, 말해주고 싶었다. 말해야 할 것 같았다.

(중략)

필요해. 같은 사람들이 많을수록 다른 사람들이 필요해. 나팔수가 필요해. 눈 돌리지 않는 사람이 필요해. 눈 돌리지 않는 것, 그걸 하기 위해 선택한 거잖아. (배윤나, p16-17)

 

 

요즘 젊은이들은 존경할 만한 어른이 몇 없어서 조금만 멋져 보여도 신이 나버리는 것이다. (이호, p3)

 

 

아이는 운에 대해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 운이 좋았던 적이 있어야 이해할 것이다. 큰 파도를 타는 것과 비슷했다. 파도가 부서질 줄 알았는데 계속되었다. 평생 그랬다. 유학생 출신답게 호 선생은 생각했다. '그레이트 라이드'였다고. 그 좋았던 라이드가 이제 끝나간다. 그렇다면 나눠줘도 좋을 것이다.

"내가 운을 좀 나눠줄게. 악수."

아이가 피식 웃으며 악수에 응했다. 싱거운 할아버지라 생각하는 게 틀림없다.

집에 돌아오니 문밖에서부터 구운 생선 냄새가 났다. 여전히 생선은 맛있다. 어릴 때 먹었던만큼 맛있다. 충분히 먹었다는 생각이 든다. 호 선생은 별로 욕심이 나지 않는다. 발밑에서 큰 파도가 다 부서져도 좋다. 지금껏 너무 많이 가졌다. 잃어도 좋다. (이호, p10-11)

 

 

서른은 사실 기꺼이 맞았다. 도무지 뭘 해야할지 모르겠는 20대가 너무 힘들어서 서른은 좋았다. 마흔은, 마흔은 조금 다른 것 같다. 삶이 지나치게 고정되었다는 느낌, 좋은 수가 나오지 않게 조작된 주사위를 매일 던지고 있다는 느낌같은 게 있다. 아직 중년처럼 보이진 않지만 중년인 것이다. (조희락, p2)

 

 

결혼은 그 나름대로의 노력이 계속 들어가지만, 매일 안도하게 되는 순간들이 있었다. 마음을 다 맡길 수 있는 사람과 더이상 얕은 계산 없이 팀을 이루어 살아갈 수 있다는 점에서 말이다. 어둡고 어색했던 소개팅의 나날을 지나왔다는 점이 무엇보다 가장 큰 안도였다. 지혜도 그런 기분으로 살아가고 있으면 좋겠다고 우섭은 잠깐 생각했다. (홍우섭, p10-11)

 

 

"사회생활을 오래 하다보면 사람에 대한 기준을 각자 세우게 되잖아요? 제 기준은 단순해요. 좋은 사람이냐 나쁜 사람이냐, 정신줄을 잘 붙잡느냐 확 놓아버리느냐. 상대방을 고려 않고 감정을 폭주시키는 걸 너무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이 의외로 많아요. 선하면서 스스로를 다잡는 사람, 드물고 귀해요." (김인지 오수지 박현지, p11)

 

 

소년의 꿈이 이루어지는 건 두려워해야 할 일이다. 그걸 깨달은 건 소년기를 한참 벗어나서였지만 말이다. (최대환, p2)

 

 

가장 경멸하는 것도 사람, 가장 사랑하는 것도 사람. 그 괴리 안에서 평생 살아갈 것이다. (이설아, p10)

 

 

4년 동안 모두가 떨어져나갔는데 작은누나는 여전히 싸우고 있었다. 어떤 사건에 피해자가 있고 유족이 있다면, 유족의 수가 훨씬 많을 것 같지만 꼭 그렇지는 않다. 어떤 가족은 싸우고 싶지 않아하고, 어떤 가족은 싸우다 지쳐 나가 떨어지고, 끝에는 남는 사람들만 남는다. (한규익, p5)

 

 

콩국수 맛이 다른가, 평소와? 규익은 조심스럽게 곧 나온 콩국수를 맛보았다. 가끔 너무 난도질당한 마음은 상태를 살피기도 난처해서 감각에만, 오로지 단순한 감각에만 의존해야 할 때가 있다. 지금은 콩국수가 규익의 진단시약이었다. 천천히 국수를 씹고, 그다음에 묵직한 그릇을 들어 콩국을 마셨다.

아니다. 같은 맛이다. 그럼 괜찮은 거다. (한규익, p9)

 

 

너무 한사람이 대화를 주도한다거나, 자기들끼리만 아는 얘기를 계속한다거나, 말끝마다 자기 자랑을 하는 경우가 없어서 편했다. 그냥 느슨하게 사는 이야기를 했는데 창민이 잘 모르는 이야기를 듣는 건 흥미로웠고 농담의 주파수가 잘 맞는 듯했다. 회사에 다니는 사람도 있었고, 회사에 다니면서 다른 걸 구상하고 있는 사람도 있었고, 회사에 다니지 않는 삶을 선택한 사람도 있었다. 스물일곱에서 서른여덟까지 있어서 모두 동갑내기는 아니었다. 나이를 따지거나 하지 않는, 분위기가 좋은 그룹이었다. 다른 사람의 선택을 존중해서 놀리기는 해도 깎아내리진 않았다. 목소리가 크지 않은 사람들. 이 사람들이라면 계속 만날 수도 있겠네, 싶었다. (윤창민, p5-6)

 

 

모든 곳이 어찌나 엉망인지, 엉망진창인지, 그 진창 속에서 변화를 만들려는 시도는 또 얼마나 잦게 좌절되는지, 노력은 닿지 않는지, 한계를 마주치는지, 실망하는지, 느리고 느리게 나아지다가 다시 퇴보하는 걸 참아내면서 어떻게 하면 지치지 않을 수 있을지 현재는 토로하며 물었다. (중략)

"그냥... 우리가 하는 일이 돌을 멀리 던지는 거라고 생각하빗다. 어떻게든 한껏 멀리. 개개인은 착각을 하지요. 같은 위치에서 던지고 사람의 능력이란 고만고만하기 때문에 돌이 멀리 나가지 않는다고요. 그런데 사실은 같은 위치에서 던지고 있는 게 아닙니다. 시대란 게, 세대란 게 있기 때문입니다. 소 선생은 시작선에서 던지고 있는 게 아니에요. 내 세대와 우리의 중간 세대가 던지고 던져서 그 돌이 떨어진 지점에서 다시 주워 던지고 있는 겁니다. 내 말 이해합니까?"

"릴레이 같은 거란 말씀이죠?"

"그겁니다. 여전히 훌륭한 학생이군요. 물론 자꾸 잊을 겁니다. 가끔 미친 자가 나타나 그 돌을 반대 방향으로 던지기도 하겠죠. 그럼 화가 날 거야. 하지만 조금만 멀리 떨어져서 조금만 긴 시간을 가지고 볼 기회가 운 좋게 소 선생에게 주어진다면, 이를테면 40년쯤 후에 내 나이가 되어 돌아본다면 돌은 멀리 갔을 겁니다. 그리고 그 돌이 떨어진 풀숲을 소 선생 다음 사람이 뒤져 다시 던질 겁니다. 소 선생이 던질 수 없던 거리까지."

(중략)

"모르겠어요. 내 견해일 뿐이지만, 나이 들어 물렁해진 건지도 모르지만 지금의 나는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젊은 사람들은 당연히 스트레스를 받지요. 당사자니까, 끄트머리에 서 있으니까. 그래도 오만해지지 맙시다. 아무리 젊어도 그다음 세대는 옵니다. 어차피 우리는 다 징검다리일 뿐이에요. 그러니까 하는 데까지만 하면 돼요. 후회 없이." (소현재, p12-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