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래』- 천명관 지음
전자도서관으로 e-book을 빌려 오며가며 읽는 재미를 알게되었다.
여전히 종이책이 진짜 독서하는 기분은 나지만, 멍하게 휴대폰 액정만 응시하며 흘려보내는 시간에 책을 읽는 건 그래도 기분좋은 소일거리이다.
<고래> 는 내가 전자책으로 읽은 세번째 책. 쪽수가 무려 900쪽에 달했지만, 소설이라 그런지 막상 읽어보니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책을 고른 이유는 없다. 그냥 이번엔 무슨 책을 읽어보지 하며, 책을 둘러보다가 문득 고른 책.
붉은 겉표지. 전반적으로 글은 어두운 분위기를 띄고 있다.
이야기는 세 명의 여자 주인공을 중심으로 여러 인물들의 기구한 삶을 조명한다. <고래>에서 행복하게 살다간 이는 어느누구도 없었다.
그래서 이야기가 현실감이 덜 했다. 이미 4년 전에 죽은 걱정의 딸이 갑자기 잉태된다와 같이 소설이라서 가능한 설정들에서부터,
중간중간에 작가가 직접 변사가 되어 독자들에게 말을 건네는 어투까지 과감하게 사용함으로써, 글은 결코 현실이 아니라 철저히 소설이기를 원했던 것 같다.
그럼에도 독자들이 <고래>를 찾는 이유는, 비극적 삶을 살다간 인물들을 지켜본 관객들이라면, 금방 자리를 뜨지 못한채, 한동안 그자리에서 아리는 마음을 안고 있을 것이므로.
박경리의 <토지>가 내가 읽어본 책 중에선 방대한 축에 속했는데, 이 점에서 <고래>와 비슷하지만,
<고래>는 지나치게 비현실적으로 삶을 어둡게만 그려놓았다. 그래서 인물의 감정에는 공감이 되었지만, 막상 그 상황에는 공감이 되지 않아,
조금 낮은 점수를 준다. 그러나 <고래>의 작가가 그리려 했던 이미지. 생명력 넘치는 고래의 모습에서 연상되는 활기에 찬 삶. 그리고 어렸을 적부터 죽음을 가까이에서 겪은 때문인지 그런 고래를 동경하는 금복. 그리고 끝내 성을 탈바꿈하게 되기까지.
고래는 남성성을 상징하기도 하는데, 그 점에서 금복이 여성에서 남성이 되는 것에 성공한다는 점은 예상을 뛰어넘는 작가의 글솜씨에 경외감이 들기도 했다.
한국 전통의 운명론적 정서를 정석으로 보여주는 글이기도 하다. 금복의 타고난 팔자 이야기라거나, 그것이 딸인 춘희에게 대물림되는 현상을 통해.
+ 덧붙이자면, 코끼리 점보와 춘희의 내면의 대화. 그리고 곳곳에 심어놓은 사회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까지. 작가는 여러가지 시도를 <고래>에서 해냈다.
한때 융성했으나 몰락하고 만 고대도시처럼 평대는 아침안개에 휩싸여 희미하게 형체를 드러냈다. 멀리서도 유난히 눈에 띄는 것은 건물들 사이로 우뚝 솟은 극장이었다. 그것은 마치 커다란 고래가 깊은 바다 속에서 숨을 쉬기 위해 막 솟아오른 것처럼 보였다. 고래 모양을 본떠 지은 그 극장은 춘희의 엄마인 금복이 직접 설계한 것이었다. -p20
과연 객관적 진실이란 게 존재할 수 있는 것일까? 사람들의 입을 통해 세상에 떠도는 이야기란 얼마나 신빙성이 있는 것일까? 칼자국이 죽어가면서 금복에게 한 말은 과연 진실일까?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죽음을 맞이할 때조차도 인간의 교활함은 여전히 그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일까? 여기서도 마찬가지, 우리는 아무런 해답을 찾을 수가 없다. 이야기란 본시 전하는 자의 입장에 따라, 듣는 사람의 편의에 따라, 이야기꾼의 솜씨에 따라 가감과 변형이 있게 마련이다. 독자 여러분은 그저 믿고 싶은 것을 믿으면 된다. 그뿐이다. -p221
당연하지. 보고 싶은 것들은 언젠간 다시 만나게 되어 있어. -p267
우리는 우리가 하는 행동에 의해 우리가 된다.
이것은 인간의 부조리한 행동에 관한 귀납적인 설명이다. 즉, 한 인물의 성격이 미리 정해져 있어 그 성격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하는 행동을 보고 나서야 비로소 그의 성격을 알 수 있다는 의미이다. 그것은 '과연 금복이 주인공이기 때문에 기적 같은 행운이 찾아온 것일까? 아니면, 그런 행운이 찾아왔기 때문에 그녀가 주인공이 된 것일까?'와 마찬가지로 이야기 바깥에 존재하는 불경스런 질문이며 '알이 먼저냐, 닭이 먼저냐' 하는 것처럼 까다로운 질문이다. 하지만 이를 통해 우리는 적어도 금복의 행동을 설명할 수는 있게 되었다. 그것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금복은 늪지대에 벽돌공장을 지음으로써 무모하고 어리석은 여자가 되었다. -p359~360
그녀가 고래에게 매료된 것은 단지 그 크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언젠가 바닷가에서 물을 뿜는 푸른 고래를 만났을 때 그녀는 죽음을 이긴 영원한 생명의 이미지를 보았던 것이다. 이때부터 두려움 많았던 산골의 한 소녀는 끝없이 거대함에 매료되었으며, 큰 것을 빌려 작은 것을 이기려 했고, 빛나는 것을 통해 누추함을 극복하려 했으며, 광대한 바다에 뛰어듦으로써 답답한 산골마을을 잊고자 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가 바라던 궁극, 즉 스스로 남자가 됨으로써 여자를 넘어서고자 했던 것이다. -p536
그것은 너무나 강렬하고 매혹적이어서 모든 것을 건너뛰는 동시에 모든 것을 단절시키는 한편, 모든 것에 우선하고 모든 것을 포섭해서 기어이 모든
을 이기는 것이었다. 이후, 사람들의 모든 삶의 양식을 결정짓게 만든 그 명제는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모든 미국적인 것은 아름답다. -p543~544
무모한 열정과 정념, 어리석은 미혹과 무지, 믿기지 않는 행운과 오해, 끔찍한 살인과 유랑, 비천한 욕망과 증오, 기이한 변신과 모순, 숨가쁘게 굴곡졌던 영욕과 성쇠는 스크린이 불에 타 없어지는 순간,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함과 아이러니로 가득 찬, 그 혹은 그녀의 거대한 삶과 함께 비눗방울처럼 삽시간에 사라지고 말았다. -p600
왜냐하면 이야기란 바로 부조리한 인생에 대한 탐구이기 때문이다.-p612
꼬마 아가씨, 너무 엄살 부리지 말라고. 그래도 살아 있다는 건 행복한 일이야.
다른 사람들도 나처럼 이렇게 고통스러울까?
글쎄, 그건 잘 모르겠지만 나에게도 힘든 시절이 있었지. 하지만 죽음보다 못한 삶은 없어. -p672
아무도 물리적인 폭력을 쓰진 않았찌만, 그들은 마치 이리 무리에 잘못 끼어든 승냥이를 쫓아낼 때처럼 냉담하고 잔인해져 있었다. 그것은 지식인의 법칙이었다. 약장수는 모든 것이 끝장났으며 자신이 떠날 때가 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힘없이 어깨를 늘어뜨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카페를 떠나기 전 좌중을 둘러보며 마지막으로 한마디 했다. ―이보시오들, 이제 심판은 그만두고 링 위에 한 번 올라가보는 게 어떻겠소? -p692
점보는 계속 날아갔다. 얼마나 빠른 속도인지 알 수 없었다. 그들은 곧 안드로메다 성운 근처 어디쯤을 날고 있었다. 하지만 움직임이 전혀 느껴지지 않아 마치 그 자리에 멈춰 있는 것처럼 보였다. 어느 순간, 춘희와 점보의 몸은 투명해지는 동시에 빛이 떨어져나가듯 점점 지워지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물 속에서 설탕이 녹는 것과 같았다. 춘희가 놀라 물었다.
우린 어떻게 되는 거지?
우린 사라지는 거야, 영원히. 하지만 두려워하지 마. 네가 나를 기억했듯이 누군가 너를 기억한다면 그것은 존재하는 것과 마찬가지니까. -p8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