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식 -『내 모든 습관은 여행에서 만들어졌다』
방송국 PD로 산 지도 어느덧 10개월째에 접어든다.
지난 열 달은 살아온 날들 중 가장 정신없는 시간이었으며, 가끔 즐겁고 주로 피폐했다.
몸과 마음이 지칠대로 지쳐, 눈 앞에서 死자가 아른거리는 날이면
턱턱 막혀오는 심장을 두들기며, 크게 크게 공기를 들이마셔야만 겨우 호흡이 가능했다.
오랫동안 꿈꿔온 일이었기에 쉽게 놓을 수도 없었다.
썩은 동앗줄에 매달린듯 아슬아슬한 하루를 간신히 넘기고,
다음날 아침 눈이 떠지면
제일 먼저 '나 아직 살아있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살기 위해, 숨 좀 쉬고 싶어서,
읽지도 못할 책을 미친듯이 사고 또 샀다.
김민식PD는 내가 아는 PD들 중 몇 안되는, 진짜로 멋진 분이다.
상식이 통하지 않는 방송국놈들이 판치는 와중에
'그래도 저 사람은 다를거야' 희망을 품게 하는, 단비같은 존재다.
7월 초, PD협회 행사에서 그를 알게되었고
그의 페이스북 페이지를 팔로우했고
이번에 저서를 읽으면서, 그에게서 나는 한줄기 빛을 본다.
이제 책을 사재기 하지 않는다. 다만, PD로 지내는 동안에
나를 지켜줄 그 '무엇'의 정체를 가늠해본다.
p33-34
드라마 연출의 실력은 잘나갈 때 나오는 게 아니라 망했을 때 나옵니다. 대본이 잘 나오고, 캐스팅이 잘되고, 편성 대진운도 좋아서 시청률이 잘 나오는 건 운이 좋은 덕이에요. 감독의 진가는 망했을 때 나옵니다. 시청률이 '폭망'했을 때, 작가의 상처를 달래고, 배우의 자존심을 세워주고, 스태프들 기운을 북돋아주는 것. 가장 크게 상처받은 감독이 함께 일하는 사람을 먼저 배려하고, 자신의 상처는 가장 나중에 돌보는 것. 그게 드라마 PD의 역할이에요. 쓰러진 바오바브나무의 뿌리를 어루만져봅니다.
'그래, 너 아직 살아 있구나. 이렇게 만신창이가 돼서도 꿋꿋이 살아 있구나.'
잘 달리는 게 실력이 아니라 넘어졌을 때 다시 일어나는 것이 실력이라고 믿습니다. 인간은 고통을 즐기는 동물이고요. 때로는 고난이 진가를 발휘할 기회가 됩니다.
p36-37
드라마로 옮기고 참 힘들었어요. 사람 때문에 힘든 것도 있었고, 욕심만큼 잘 되지 않아 힘들기도 했어요. 잘하고 싶다는 욕심과 성과의 괴리 탓에 힘들지요. 일 때문에 힘들 때, 일을 계속 붙들고 있으면 망가지기 쉽습니다. 일과의 거리가 필요해요. 아니 때로는 나 자신과의 거리가 필요해요. '나를 키우며 일하는 법'이라는 부제를 단 《일하는 마음》(제현주, 어크로스, 2018)에서 저자는 거리의 필요성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나와 너무 가까운 것에 대해 담담하기란 쉽지 않다. 우리는 어떤 일이나 상황에서 나를 떼어내고 바라보는 데 서투르다. 그 때문에 자기 자신에 대해 그렇듯, 늘 그것을 지나치게 포장하거나 지나치게 낮추어보게 된다. 그리하여 자기 일을 더 큰 그림 안에서 바라보려면, 그 일의 여러 층위와 의미를 다면적으로 이해하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거리다. 일을 통해 나를 보는 것이 아니라 일 자체를 보는 것.」
p47
저는 혼자 걷기 여행을 가면 식사는 김밥으로, 잠은 찜질방에서 해결합니다. 돈 거의 안 듭니다. 나이 50에 왜 그러고 사느냐고 물으신다면, 배낭여행의 추억 때문이라고 말하렵니다. 바게트로 끼니 때우고 도미토리에서 자면서도 마냥 즐겁기만 했던 그 시절을 잊지 않으려고요. 물론 젊어서 고생했으니 이제는 럭셔리한 여행을 즐겨도 되지 않느냐고 말할 수도 있지요. 사람들은 업그레이드를 좋아합니다. 차를 바꾸고 집을 바꿀 때 항상 이전 것보다 더 나은 것을 선택하지요. 욕망을 채우는 삶에서는 시간이 갈수록 선택의 폭이 줄어듭니다. 욕심은 끝이 없고 돈은 한계가 있거든요. 그래서 저는 때로는 더 험한 것, 더 불편한 것을 선택합니다. 그래야 선택의 폭이 넓어집니다.
p67
PD라는 직업은 일과 삶의 조화를 이루기 참 어려운 직업이지요. 작가, 배우, 촬영진 등 각 분야의 전문가들과 일하는데요. 대본 작업에서부터 촬영, 편집, 선곡에 이르기까지 모든 작업에 관여하기에 노동 강도가 무척 높습니다. 예전에 미니시리즈 <내조의 여왕>을 연출할 때는 하루에 두 시간씩 자면서 일했어요. 새벽 5시에 촬영이 끝나면 집에 가서 씻고 곧장 다시 나와 아침 7시부터 일한 날도 있었어요. 드라마가 끝나고 면역력 저하로 대상포진에 걸려 고생하기도 했어요.
p69-70
직장 상사의 갑질을 견디고 고객의 갑질을 견디며 일하는 일상이 내 삶의 전부라고 인정하는 순간, 너무 괴로웠어요. 일은 삶을 유지하기 위해 돈을 버는 수단에 불과하고, 나의 진짜 인생은 일이 끝나는 순간 시작한다고 믿어야 힘든 직장생활을 버틸 수 있었어요. 일에서 오는 정신적 괴로움을 잊기 위해 퇴근 후 영어 공부에 매진했습니다. 취미 삼아 하는 영어 공부가 아무리 즐거워도, 그게 일터에서 겪는 괴로움을 대체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결국 일 자체를 바꿨지요.
경제학 박사인 우석훈 저자는 한 인터뷰에서 저서 《민주주의는 회사 문 앞에서 멈춘다》(한겨레출판,2018)에 대해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요즈음 유행하는 용어가 워라밸이다. 워크, 즉 직장은 나쁘고 라이프, 즉 직장 밖의 삶은 좋다면서 밖에서 기쁨을 찾겠다는 거다. 개인적 차원에서는 그게 맞는데 사회적으로 그게 괜찮나. 아니다. 그것은 결국 워크를 지옥으로 계속 두자는 것이다. 선진국은 그렇게 안 했다. 회사를 지옥으로 방치하는 것은 정치의 실패를 말한다. 이건 합의도 쉽고 논의만 하면 빨리 해결할 수 있다. 우리의 민주주의 수준이 높아졌기에 기업 민주주의도 쉽게 할 수 있다.」
워라밸이 필요한 이유는 고객의 갑질을, 상사의 갑질을 견디기가 힘들기 때문입니다. 일하는 환경이 너무 열악해서 그래요. 워라밸도 중요하지만, 워라밸을 신경 쓸 필요가 없는 일터를 만드는 게 더 중요합니다. 퇴근 후 나의 삶이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일터에서 서로의 삶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문화가 자리 잡히기를 소망합니다.
p73
《여행의 심리학》을 쓴 심리학자 김명철 박사는 무언가를 더 잘하기 위해서는 세 가지 마음가짐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첫째는 내가 잘할 수 있다는 믿음, 즉 자기효능감이고요. 둘째는 자신의 성장을 위해 그 일을 하는 것이고, 셋째는 그 일을 스스로 평가할 수 있는 기준을 갖춰야 한다는 겁니다.
p85
돈을 벌기는 쉽지 않지만, 아끼는 건 쉬워요. 돈을 벌려면 타인의 욕망을 충족시켜줘야 하는데, 돈을 아끼려면 나의 욕망만 절제하면 되거든요. 다들 돈 벌 방법을 연구하지만, 궁극의 방법은 돈을 아끼는 습관이라 생각합니다. (중략) 인생의 위기는 주로 돈을 더 벌고자 할 때 옵니다. 돈에 대한 욕심을 줄이면 인생이 훨씬 여유로워집니다. 유럽 배낭여행을 통해 배웠어요. 돈이 없다고 즐기지 말라는 법은 없다는 것, 덜 벌고 더 즐겁게 사는 방법도 있다는 걸 말이지요. 지금도 회사생활을 하다 선택의 갈림길에 서면 자신에게 물어봅니다. '돈을 버는 게 중요한가, 자유롭게 사는 게 중요한가?' 저는 후자를 선택합니다.
p110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를 보면, 사치재는 보통재로 바뀌는 게 운명이랍니다. 부자들이 시작하면 곧 일반 서민들도 따라 한다는 거지요. 모든 사람이 하면 더는 차별화 포인트가 아니게 되지요. 그럼 부자들이 또 새로운 사치재를 찾아 나섭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선 소수가 강렬하게 원하는 것을 만들면 돈을 벌 수 있어요. 비싼 돈을 주고라도 사고 싶은 상품이 값싸고 실용적인 물건보다 유행을 선도하니까요.
p133-4
'술집에 갔을 때, 사람이 붐비는 곳에선 생맥주를 시키고 손님이 없는 곳에선 병맥주를 시켜라.' 생맥주는 신선도가 생명인데요. 손님이 없는 집은 맥주의 순환이 느려 김빠진 생맥주가 나올 가능성이 큰 반면, 사람이 붐비는 집은 순환이 빨라서 맥주통도 새것이 계속 들어오죠. 거리 음식을 먹을 때도 요령은 같습니다. 사람이 많은 가게에 가서 현지인들이 갖아 많이 먹는 요리를 시킵니다. 제일 잘나가는 요리의 재료가 가장 신선하거든요.
p156
늙으면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귀담아듣지 않아요. 평생을 살면서 굳어진 자신의 믿음대로 그냥 삽니다.
p157
매년 추석마다 아버지를 모시고 여행을 다니는 저를 보고 효자라고 하는 분도 있는데요. 괴로움이 커서 그래요. 회사에서도, 집에서도. 회사에서는 일을 시키지 않고 집에서는 고부 갈등이 심하니까 이런 해법을 찾아낸 겁니다. 괴로움이 닥치면 그 괴로움을 즐거움으로 바꾸는 방법을 찾습니다.
p166
일할 때 소리를 질러야 자신의 권위가 선다고 생각하는 직장 상사가 드물지 않은데요. 소리를 지르거나 화를 내는 사람은 아마추어라고 생각해요. 일이 제대로 안 되는 건 셋 중 하나입니다. 부하 직원에게 업무 지시를 정확하게 하지 못했거나, 직원의 역량에 비해 과도한 업무를 맡겼거나, 팀을 꾸릴 때 팀원의 역량을 파악하지 못했거나. 셋 다 리더의 잘못이지 직원의 잘못은 아니거든요. 더욱이 공개적인 자리에서 소리 지르고 지적한다고 해서 일이 나아지진 않아요. 그냥 상사의 분풀이일 뿐이죠. 오히려 팀의 업무 효율을 갉아먹기 십상입니다. 그런 상사를 만나 심신이 피폐해지면 장기 휴가로 대응하세요. 당신은 소중한 사람이니까요.
p171
여행에서 시간이 부족할 때는 돈을 써야 하고, 돈을 들이지 않으려면 시간이 여유로워야 해요.
p180-1
전망대를 오르다가 감탄했던 것은 그 계단입니다. 간격이 딱 적당하더군요. 가파른 곳은 촘촘하게, 완만한 곳은 여유 있게. 아무 생각 없이 걸어도 계단의 폭만 따라 발을 움직이면 급경사는 조심조심, 완경사는 성큼성큼 걷게 됩니다. (중략) 이곳의 계단을 만든 사람이 일할 때 고민을 많이 했다는 티가 납니다. 유럽이나 일본 여행이 편리한 이유는 시스템이 잘돼 있어 개인이 일일이 선택하지 않아도 되도록 해두었기 때문입니다. 시스템만 따라 해도 불편함이 없어요. 시스템에 대한 믿음은 한 사람 한 사람의 고귀한 노동에서 나옵니다.
'먹고살기 위해 일하는 게 아니라, 나의 기술로써 세상을 편안하게 한다'는 자부심이 계단에서 느껴집니다. 그런 자부심이 장인 정신의 기본입니다. (중략)
'나 한 사람의 수고로 여럿이 편안해진다.'
진화는 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발전이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진화는 다양성의 증가더군요.
p185-6
직업적인 권위로 따지자면 드라마 감독도 빠지지 않습니다. 현장에서 제가 "큐!"하고 외치면 수십 명이 동시에 움직이고, "컷!"하면 일제히 멈춥니다. 평생 PD로 일하다 권위에 중독될까봐 두려워요. 권위에 중독되면 말년이 외롭거든요. 퇴직 후 남자들의 과제는 '권위에 익숙해진 삶과 결별하라'입니다.
p206
철학자 강신주 선생은 학교 선생님을 만나 강의하는 자리에서 이렇게 물어본다고 해요.
"그래서 여러분은 유괴범입니까, 스승입니까?"
아이를 볼모로 잡아 부모에게 돈을 받으면 유괴범이 되고, 아이를 가르치는 게 좋아 열심히 일했는데 나라에서 돈도 주면 참 스승이 된다는 거죠. 부모도 마찬가지예요. 미래를 볼모로 불행을 예단하면 아이들은 언어폭력의 피해자가 될 수 있어요. '공부 열심히 안 하면 불행해질 것이다', 결혼 안 하면 나중에 후회할 것이다', '자식을 낳지 않으면 늙어서 외로울 것이다'등 이런 말은 한 번만 들어도 충격이 큰데 부모에게 이런 말을 반복적으로 듣고 자라면 어떻게 될까요? 부모 말대로 하거나, 아니면 그런 부모와 멀어지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어느 쪽도 아이가 바랐던 삶은 아니죠.
p242
저는 가진 게 하나도 없다고 생각해요. 오히려 제가 세상에서 얻을 게 많지요.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마음이 편안해지고 싸움에서도 눌리지 않아요. 잃을 게 없다고 각오해야 모든 걸 얻을 수 있는 법이니까요.
p287
일을 할 때도 영역 보호 본능이 유난히 강한 사람을 만나게 될 때가 있어요. 내 딴에는 열심히 기획안을 짰는데, 그걸 본 상사가 시키지도 않은 일을 했다고 화를 내는 경우지요. 직원이 독립적으로 판단하는 것을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해석하는 보스가 있어요. 그럴 때는 웃으면서 "네"하고 물러나면 됩니다. 길길이 뛰는 모습을 보며 '하긴 나보다 연봉도 많이 받는 양반이니, 비싼 몸값 증명하느라 오늘도 애쓰시는구나'라고 생각하면 한결 마음이 편해집니다.